문제적 풍경 앞의 디자이너

New Design Studio
9 min readMar 15, 2021

NDS weeknote, 효리의 첫번째 이야기

풍경 1

박막례 할머니 유튜브 채널
출처: <막례는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식당> 박막례 할머니, 유튜브

햄버거를 사러 들어가 키오스크를 마주하고 속이 답답해져버렸다. 나는 지난 몇 년 간 어떤 매장을 가든 키 크고 화려한 저 애물단지를 기꺼이 써본 적이 없다. 거대한 화면 앞에서 소모적인 시선 운동으로 탐색하는 과정은 나에게 과도하고 불필요한 피로였다. 그래서 언제나 직원에게 다가가 직접 말로 주문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허기진 채 들른 이 햄버거 가게에서는 이제 키오스크 주문만 가능하다고 했다. 퉁퉁 불어서 발걸음을 돌렸다.

이미 한 노부부가 키오스크 앞에 서 있었다. 한껏 예민해진 나와 달리 그들은 매우 멋쩍어 보였다. 단번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만 애써 웃으며 누가 우리를 욕하는지, 누가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지 살피는 그들의 눈치를 다시 내가 살피며, 어쩐지 짜증이 누그러졌다. 방어와 동시에 간청하는 그들을 도울 행운의 인물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대신 주문해준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그들에게 번호표를 건네며 “이 번호가 저기 뜨면 카운터에서 받아가시면 된다”는 친절한 지침도 잊지 않았다.

그들 뒤에 선 사람이 내가 아니라 위아래 없는 폭군이었다면, 그들은 그저 허기져서 들어가본 햄버거 가게에서 불운한 상황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 존재는 그들에게 사소한 행운이었다. 일순 우스워졌다. 그깟 햄버거가 뭐라고 이런 얄팍한 영웅심리라니. 배고프면 아무나, 아무때나 들어와서 사먹을 수 있어야 할 햄버거인데, 지금 내가 이것 때문에 기분이 좌지우지되고, 저 노부부는 불확실한 행운에 기대야 한다니.

내 차례를 기다리며, 아무 감정 없이 멀뚱히 서있는 키오스크와 거침없이 다가가 매끄럽게 주문하는 젊은이들, 주방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는 직원들, 반면 혹시나 번호를 놓치지는 않을까, 누가 봐도 노심초사하며 부자연스럽게 서있는 저 노부부를 바라보며, 나의 불만과 예민은 얕은 성취감으로, 최종적으로 어색한 민망함으로 변모했다.

풍경 2

출처: <노인들이 기차에서 서서 가는 까닭> 오마이뉴스

수 년 전 회사에 다니던 시절, 나에게는 주말마다 반복되는 일상이 있었다. 주말부부였던 나는 신혼집에 가기 위해 토요일마다 KTX역에 갔다. 마침내 얻는 소중한 자유시간이었다. 평일에는 직원들에 둘러싸여 만연한 긴장감 속에 일하고, 주말마다 만나는 남편과는 많은 신혼부부가 그러하듯 크고 작은 실랑이가 끊이지 않아 감정적인 소모가 많았다. 하지만 주말마다 찾는 기차역에서만큼은 혼자서 유유자적하며 생각과 감정의 끈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었고, 어딘지 모를 곳을 오고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남모르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어떤 이야기라도 갖고 있을 그들의 면면을 조용히 살피는 일은 꽤 재미난 여가활동이었다.

이렇게 여유로운 듯한 기차역에는 그러나, 또다른 풍경이 있었다. 표 예매 창구 앞에 길게 줄지어 선 노인들의 풍경이었다. 온라인 예매 과정에서 심각한 오류나 실수에 봉착한 젊은이들을 제외하고는 그 줄의 대다수는 노인들이었다. 몇 시간 전 앱에서 예매할 때 잔여석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을 확인했기에 저들 중 대다수는 바로 다음 차를 타지 못하거나, 타더라도 입석으로 몇 시간을 서서 갈 확률이 높아 보였다.

자신의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연한 듯 줄 서서 기다리는 그들을 보며 나는 즐거운 상상을 떠올릴 수 없었다.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그들 옆을 지나다가, 스스로도 과하다 싶을 만큼의 죄책감으로 어색하게 절뚝였다. 기차역에는 부당하게 분리된 풍경이 존재했고 나는 방관자로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 꾹 참으면 그런 불편한 감정들은 금방, 쉽게 사라지곤 했다.

풍경 3

출처: <’마스크 대란' 소외된 서울 노인 “일회용도 아까워서 빨아 써”> 천지일보

올해 초, 코로나 바이러스가 막 퍼지던 무렵, 간혹 마스크를 끼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대부분 노인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무지에 학을 뗐다. 바이러스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런데 어느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한 할머니를 보고 가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KF가 아닌 얇은 파란색 덴탈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한 눈에도 열흘 이상은 착용한 것처럼 보풀이 많이 일어나고 변색되어 있었다. 일회용 마스크는 한 번 이상 쓰면 효과가 없다는 뉴스가 쏟아지던 시기였는데도 말이다 (지금은 일회용 마스크의 다회 착용을 권장한다). 그리고 이런 뉴스를 보았다.

… 나중에 알고 보니 오프라인에서 마스크 사려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정씨같이 비교적 나이 든 사람밖에 없었다. 웬만한 젊은 사람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마스크를 구입했다. “저도 따라해 보려고 검색을 해봤는데 앱을 깔아야 하더라고요. 쿠팡 앱을 찾아 설치하는 데는 성공했어요. 그런데 가입하고 물건을 검색하는 데만 한나절이 꼬박 걸렸습니다. ‘로켓’은 또 뭐고 배송은 어떻게 된다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봤다가 결국 포기했어요.” (<코로나19로 드러난 디지털 디바이드>, 주간조선)

한창 마스크 대란이던 시기, 마스크가 귀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접근 불가능한 상태는 아니었다, 나에게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네 약국별 마스크 재고상황을 알려주는 서비스를 체크한다거나 온라인 쇼핑몰의 마스크 게릴라 판매를 놓치지 않고 추적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일만 눈과 손으로 고생하니 집에 마스크가 차고 넘치게 되었다.

마스크를 쓰면 바이러스에 노출될 확률이 낮아진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바이러스 노출 확률이 높아져 나의 면역체계가 시험 받고, 혹시라도 감염되어 이상 징후가 발현되면 심각한 합병증을 앓거나 심한 경우 사망할 수도 있다. 마스크를 어떻게 사는지 “아는 자,” 차고 넘치는 마스크를 “가진 자”인 나는 심지어 그들보다 더 안전한 삶을 보장받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은 있어도, 이것을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는 풍경이었다.

이 일련의 햄버거 가게와 기차역, 코로나 사태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그 중심의 디지털 기술이다. 우리 삶의 질을 높여주는 듯한 이 기술들은, 다른 한편으로 누군가의 단순한 끼니 해결을 가로막고, 기차에서는 서서 가게 하며, 나아가 생명까지 위협한다. 물론 기술 자체가 이들을 떠미는 것은 아니다. 기계가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공장을 때려부수었던 러다이트식 접근법을 쓸 수는 없다. 자유로운 시장주의나 민주주의 체제 하에 슬기로운 선택을 지향할 것만 같던 우리 사회에 왜 이런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일까?

춤추는 곰을 양산하는 디지털 기기/서비스 생산자와 그것을 아무런 제약 없이 구매하고 배포하는 사업자,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못하거나, 제재를 두더라도 미미하고 형식적으로 넘기는 정부, 전혀 다른 사용자 유형에 깊게 공감하지 못하는 디자이너 및 여론, 급격한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발맞춘 사용자 조사를 게을리 하고 있는 연구자들, 배우고자 하지 않는 노인, 이해하려 들지 않는 젊은이, 고대까지 타고 올라가는 세대 갈등…

문제의 원인은 다채롭고 복합적이다. 우리가 어떤 프레임으로 문제를 규정하고 들여다 보느냐에 따라 원인은 가지각색으로 나타날 것이다. 예를 들어, 위 사례들과 관련하여 최근 정부가 757억을 투자해 디지털 포용 정책의 일환으로 노인을 위한 디지털 기기/서비스 활용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출처). 반면 울산과학기술원 (UNIST)에서 서비스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는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대를 초월한 주민 통합 앱 서비스를 기획하고 있다. 전자는 문제의 원인을 시대의 새로운 흐름에 빠르게 탑승하지 못하는 노인과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는 디지털 양극화에서 찾았고, 나와 내 동료의 경우에는 디지털 시대가 초래하는 급격한 사회적 분열과 고도로 발달하는 기술 앞에서 점차 부재되는 소규모 연대의식에서 찾았다.

틀린 것은 없다 (오류가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각자가 프레임화하는 행위 자체를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문제든 원인과 증상 모두 다양하며 각각 해결해야 할 가치와 필요는 물론, 그것을 위해 투입될 수 있는 분야의 인력이 따로따로 존재한다. 그들은 때에 따라 독립적이기도 하고 상호의존적이기도, 혹은 위계적이기도 하다.

다만 디자인을 업으로 하는 나에게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위와 같은 문제적 풍경 앞에 디자이너로서 섰을 때,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고 풀이해야 하냐는 것이다. 위의 풍경들 앞에서 개인으로서의 나는 침묵하고 등 돌렸다. 아무리 민망하거나 부당하다 느껴도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말 그대로 “없다.” 키오스크를 때려부술 수도, 기차역에서 노인들의 긴 행렬을 뚫고 매표소에 쳐들어갈 수도, 전국의 노인들을 위해 마스크를 대신 구매해서 보내줄 수도 없다.

대신 내가 가진 몇 가지 부캐 중 디자이너는 조금 다르다. 특히 공공 서비스 디자인을 지향하는 디자이너에게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 근본에 가장 가까운 영역에 다가가 악순환의 고리를 느슨하게 하거나 끊을 수 있는 역할을 스스로 만들 수도 있다. 나는 디자인이 전문 영역으로서 힘을 얻고 다양한 분야에 디자인적 방법론이 적용되는 지금 이 시기가 사회 문제를 등한시하지 못하는 디자이너들에게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얼마전까지 포스터나 책, 로고 등으로 돈벌이를 할 때에,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들은 이미 채워진 내용 위에 겉 껍데기를 꾸미기 위해 디자인을 요청했고, 단순한 오퍼레이터로서 디자이너를 소모했다. 많은 디자이너 계발서에서는 문제의 원인을 발견하고 주체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끌고 나아가야 진짜 디자이너라며 사명감을 불어넣어주지만, 실제적인 박봉과 격무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그 사명이란 실체 없는 신기루,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각자의 모니터에서 벗어나 머리를 맞댄 채 끊임없이 질문하고 토론하고, 기꺼이 현장에 나가 살아있는 목소리를 들으며 수렴하고 있는 지금,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있다.

끝.

--

--

New Design Studio

New Design Studio is a design research practice and laboratory for public service and policy at Department of Design in the Ulsan National Institute of Science.